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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화활동 [인문학 특강후기]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여행, 새로운 일상 - 임영신

  • 관리자
  • 2014-11-30 1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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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첫날, 신나는애프터센터 마을인문학도서관에서는

'여행'을 주제로 만나는 인문학 특강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여행, 새로운 일상 이라는 주제로

공정여행 전문가이자 평화활동가인 임영신 선생님을 모시고 특강을 진행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특강에 참석해주셨고

다들 진지한 눈과 귀로 임영신 선생님의 말씀 하나 하나를 경청했더랬죠.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주셨는데

특히나 세월호 이야기가 잠시 나왔을 땐

모두가 눈가에 눈시울이 붉어졌답니다.

여행이 소비가 아니라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 속에서 평화로운 상상을 펼쳐나가는 임영신 선생님의 이야기는

다들 새로운 여행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도 소중한 시간,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아래에 임영신 선생님의 발제문을 첨부합니다.

다들 꼭 읽어보시기 바래요 ^^

 

 

ps. 임영신 선생님의 특강을 맞이해 센터에서는 여행과 관련한 책을 특별 코너로 만들었어요. 많은 분들 센터에 놀러오셔서. 여행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래요 ^^

IMG_331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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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선생님 강의록 입니다.

여행의 역사

한 때 여행은 고행이었다.

"다행이야, 올해는 이제 다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니..“

여행의 역사에 남아있는, 18세기 한 숙녀의 말이었다. 여행인류학자 부어스틴은 당시, 여행을 의미하는 단어인 ‘Travel’은 고생이나 노동, 고통 등을 의미하는 ’Travail"과 같은 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행을 하는 이는 남자, 순례자, 상인, 탐험가, 관리 등으로 쉽게 분류되었고, 그들의 이동수단은 도보 혹은 말이나 마차였다. 돈이 있는 귀족이라 한들 고행은 피하기 어려웠다. 마차를 탄다 하여도 비포장 길 위에서 마차들은 곧잘 바퀴가 빠지곤 했고, 춥고 씻을 곳조차 없는 한 데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곤 했던 여행의 고생들을 피할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여행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뜻하는 단어가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즐기기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 ‘Tourist'의 출현이었다.

한때 여행은 특권이었다.

관광객Tourlist’19세기 초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견문을 넓히기 위해 3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던 영국의 젊은 귀족을 겨냥한 말, 여행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40년 철도가 달리기 시작하고 토마스 쿡이라는 여행사가 생겨나며 여행의 특권은 관광이라는 상품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현대적 형태의 선불제 패키지 여행(All-Inclusive)이 태동된 것은 1846, 영국에서였다.

기차가 여행비용을 5분의 1에서 10분의 일까지낮춰 주고 패키지상품이란 여행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자, 누구든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최초의 여행사 토마스 쿡의 슬로건이 그것을 잘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만인을 위한 열차를 운행합니다.”

“We must have railways for the millions.”

침례교 순례 선교사 토마스 쿡은 술집이나 알콜을 대신하는 건전한 오락을 노동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값싼 표로 단체여행을 조직했다. 쿡이 만든 크고 작은 단체 여행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금은 확정되었고, 선불로 값을 지불했고, 종종 할인된 패키지 여행이었다. 더욱이 그 여행은 문명화되지 않은 나라들에서 통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쿡을 찾아가면 열차는 물론 식사와 숙박까지 모두 쿡이 책임을 지는 싸고 편안한 여행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단 한 번만 그에게 돈을 지불하면 이후에는 지갑을 열 필요가 없는, 승강이를 할 필요도,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가능케 해준 것이다. 쿡의 시대를 지나며 영어에는 투어리스트에 이어 Sightseeing(관광)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함께 출현하기 시작했고, 여행의 역사는 그를 교육받지 않은 사람과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외국 여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신분과 교양이 아니라 돈과 휴가였다.

한때 여행은 탈출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시작된 도시과 공장의 생활, 노동과 여가가 분리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고정적 임금 등을 가진 노동자들의 탄생은 그들이 다음 노동을 위해 쉬어야 할 공간과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어두운 공장과 질식할 것 같은 작업소, 음침한 임대 아파트 단지로부터 자연으로 나가고자 하는 절박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던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 시민들은 앞 다투어 쿡의 기차에 올라탔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은 여행이 아니라 휴가였다. 당시 휴가허락받아 떠나는 여행이란 뜻이었다. 지금도 그렇듯 허락받아 떠나는 여행은 여러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짧았고, 비용을 아껴야 했다.

괴테의 말을 바꿔서 표현하자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여행하지 않고 도착했다. 짧은 시간, 자신의 쉼을 위해 달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고(Sightseeing), 돌아와 다시 일해야 하는 관광객(Tourist)이 세계의 길들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여행은 유행이자 위신의 문제였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영국에서 시작된 대량 관광, 패키지 관광의 물결은 먼저 유럽을 강타했다.

철도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노동자, 시민 계층, 또 곳곳에 퍼져있던 제국의 식민지 등으로 여행의 바람은 더욱 크고 강하게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쿡의 강력한 라이벌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등장해 1981년 여행자 수표를 상품화 하고, 1985년엔 유럽 지점에 문을 열었다. 그들은 여름이면 해변의 리조트를 찾아 가기 휴양을 즐기기 시작했고, 해변의 리조트들이 가장 아름다운 해변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대중여행(Mass tourism)을 통해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 그에 맞는 경제적 여유, 또 새로운 경제적인 꿈을 찾으려는 욕망이 사람들의 여행욕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1882, 스위스 전역에는 42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1910년엔 무려 22백만 명이 스위스를 찾았다. 스위스는 거주민보다 많은 여행객과 관광객, 등반가, 요양객,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찾는 유럽의 호텔이 된 것이다. 1905,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몇 달을 걸리는 항해를 통해 유럽을 여행한 미국인 수는 무려 25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당시 발터 벤야민이 물신에게 가는 순례여행지라고 혹독히 비판했던 만국박람회, 식민지 박람회 등은 유럽이 세계를 향해 눈을 뜨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약 64만 명이 관람을 했고, 1867년 시카고엔 27백만 명, 1900년 파리 박람회에는 무려 5천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당시 유럽의 인구가 2억을 밑돌았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의 인구가 세계라는 거대한 책을 보기 위해 여행하고 또 여행한 것이다. 1867년 출시된 8개월간의 세계여행 상품은 무려 봉급생활자의 2년 월급을 털어 넣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행을 향해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았다. 1873년 출간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8개월이라는 세계일주 기간을 80일로 단축시킨 경이롭고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배와 육로, 기차 등을 이용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본 기록을 출간해 화제를 모은 것이다. 모든 열풍이 그러하듯 뜨겁게 몰아친 대량관광의 열풍은 지나간 자리마다 도저한 물집을 남기곤 했다.

관광객이 지나간 자리

1829, 한 이탈리아의 화가는 로마의 영국인들이라는 삽화를 남겼다. 그것은 말을 탄 채 거리의 현지인들을 치고 지나가며 바쁘게 로마의 신전과 고대유물을 망원경으로 구경하며 지나가는 부유한 영국인들의 풍경이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물론, 신전과 고대 유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틈조차 없었다. 그저 그곳을 지나가는 것, 그곳을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둘 뿐이었다.

독일의 한 삽화가는 른 대성당의 영국인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의 제목은 그들은 퀼른 대성당을 해치웠다였다. 신자들이 모두 기도를 하는 쾰른 대성당 내부에서 예배자들을 무시한 채 무례한 관광객들이 가이드북처럼 보이는 책을 들고 천장을 바라보며 감상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토마스 후드는 단체로 몰려오는 영국의 관광객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떼 지어 왔다. 라인의 숙소들은 라인 지역 제후의 초상을 영국 여왕의 흉상으로 대체했다. 강변에 새로운 호텔이 들어섰다. 사보이, 캘튼, 브리스톨과 같은 영국 호텔 이름이 전 대륙을 휩쓸었다.”영국의 소설가 트롤럽은 그렇듯 떼 지어 나타나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이렇게 꼬집고 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은 접을 수 있는 예쁘고 견고한 가방을 들고 지갑이 두둑하며 매끈하게 면도한 영국인들을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듯, 어부가 청어와 고등어를 기다리듯 정기적으로 기다렸다.” 두세기가 지난 지금, 3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듯, 어부가 청어를 기다리듯, 1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수많은 비난과 대량관광이 폐해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여행은 당대의 유행이자 위신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내 하나의 문화가 되어 유럽사회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이

제 삶을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위해 살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1842년 테모도르 폰타네는 그 시절 여행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는 날씨가 주요한 이야깃거리였다면, 이제 여행이 주요한 이야깃거리이다. 사람들은 10월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번 여름에 어디에 있었어요?’라고 묻고 겨울부터 부활절까지 다음 여름에는 어디로 갈 건가요?’라고 묻는다. 1년의 열한 달을 나머지 한 달을 준비하는 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한 달은 존재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일 뿐이다. 그들은 열두 번째 달을 위해 산다. 이 한 달을 위해 생각하고, 궁핍하게 살아간다.”

여행인문학 2 새로운 여행의 꿈

성직자, 군인, 정치가가 아니면 여행할 수 없었던 특권으로서의 여행이 산업혁명을 거치며 만인의 여행으로 내려서자 그것은 동시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것은 국경을 넘는 만남이 미움과 갈등을 넘어, 세계의 모순을 함께 해결하며 평화에 다다르게 할 것이라는 새로운 꿈이었다.

유스호스텔 운동, 에스페란토 국제대회, 국제워크캠프

관광산업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00년 전, 유럽의 어느 한 켠에선 돈 없는 어린이, 학생들이 여행을 쉽게 하도록 돕는 유스호스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09년 초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8일째 3000킬로를 걷는 무전여행을 하며 매일 잘 곳을 고민하던 한 초등학교 교사, 리하르트 쉬르만 (Richard Schirrmannn) 자신이 근무하던 초등학교 교실을 개조해, 검소하고 청결한 유스호스텔의 첫 모델을 만들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국제적인 이해와 교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며 유스호스텔운동은 유럽을 넘어 아시아, 전 세계로 퍼져가 1931년에는 2,100개로 증가했고, 이용자도 420만 명에 달했다. 현재 전 세계 유스호스텔은 전 세계 94개국, 6000여개의 호스텔이 설치되어 있고, 500여 만명의 회원이 유스호스텔을 이용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05, 프랑스 볼로뉴에서는 국경을 넘는 여행 뿐 아니라 소통을 꿈꾸는 이들이 함께 모여 먹고 마시는 최초의 에스페란토 국제 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 33개국에서 688명이 참여해 하나의 언어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노래했다. 그들은 강한 나라의 언어가 약한 나라의 언어를 짓누르고, 또 언어로 인한 몰이해와 증오로 인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하나의 언어를 통한 만남과 이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4년 시작된 세계 제 1차 전쟁은 전 유럽을 폐허와 실망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 속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국경을 넘는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Verdun근교의 Esnes지역에서 폐허가 된 마을을 복구하기 위해서 스위스인 Pierre Ceresole의 주도에 의해 유럽의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들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국적을 묻지 않고 함께 모여 서로의 차이와 입장을 이해하고 경험하며 친구가 되어간 그 여행과 만남이 작은 한 마을 뿐 아니라 전쟁으로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한 새로운 관계의 그물망이 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된 국제워크캠프는 현재 약 100개국에 약 300개의 국제자원봉사 전문단체들이 활동하는 거대한 네트워크, 또 연간 약 3,000개의 프로젝트가 개최되며 매년 약 50,000명의 국제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움직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의 불길은 멈출 줄을 몰랐다. 평화에 대한 믿음보다는 전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던 탓일까? 전 세계는 다시 2차 대전을 통해 600만명이라는 규모의 어마어마한 살상을 경험해야 했다. 평화의 부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맹렬히 평화에 다다르는 길을 찾기 시작했고, 여전히 여행이 그 길이 되리라는 희망을 져 버리지 않았다.

전쟁을 넘어서는 여행자들, 서바스, 파스포스타 세르보

1949"여행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 한다"는 취지로 SERVAS라는 이름의 단체가 유엔산하 유네스코에 비영리단체 등록을 했다. 서바스(Servas)란 이름은 에스페란토어로 "We Serve"란 뜻으로서 2차 세계대전 후 Work Study Travel SystemPeace Builder 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학생 그룹에 의해 시작된 여행운동이었다. 서바스 회원이 된 다는 것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올 낯선 여행자를 자신의 삶에 참여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삶의 집의 문을 여는 이유는 오늘날 흔히 악용되는 공짜숙소를 통한 저렴한 여행이 아니라 세계의 여행자 서로 여행자와 호스트의 입장을 경험하고, 인종과 국적을 넘어선 타인을 자신의 삶에 참여케 함으로서 편견을 없애고 벽을 허물어 평화에 다다르는 여행인 것이다. 현재 서바스는 전 세계적으로 130여 나라에 지부가 있고, 13천여명이 호스트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966, 에스페란토를 쓰는 이들 역시 서바스와 비슷한 여행을 통한 평화, 에스페란티토들을 위한 민박 시스템, 파스포르타 세르보(Pasporta Servo, 에스페란토 국제 홈스테이 시스템)을 시작했다. 서바스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은 집 뿐만 아니라 평등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통해 전 세계 어디에 있는 누구든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에스페란티토들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에스페란토를 하는 이들과의 만남에 방점이 놓여있었다.

1960년대, 평화봉사단 그리고, 히피문화

여행을 통한 평화에 대한 상상은 어느새 민의 영역을 넘어 관으로 이관되기에 이르렀다. 1961년 존 에프 케네디는 여행은 평화와 세계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힘이라고 격찬하며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2년을 개발도상국에서 보내는 것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에프 케네디는 그의 공약대로 정부의 독립 연방기구로 평화봉사단을 설치했고 평화봉사단은 1961년 가나 탄자니아를 시작으로 47년간 139개국에 187천명을 이년씩 파견했다. 현재는 73개국에서 7749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1966년부터 81년까지 약 3200명이 다녀갔다. 한국 역사학자로 유명한 브루스커밍스 교수도 한국 평화봉사단 3기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을 새롭게 보고 인생의 경로를 바꾼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국가가 전 세계를 돌보자는 평화봉사단을 주도하며 동시에 베트남에 무차별 폭격을 멈추지 않던 1960년대 국가의 모순을 직면하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히피라는 새로운 문화가 반전운동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여행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었으며, 학교였고 집이었다. 특히 인도 등 아시아의 국가들은 영성과 신비의 땅으로 비추어지며 그 여행의 주요한 행로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도의 여행지 고아, 리리케쉬, 네팔의 포카라 등은 이 무렵 형성된 여행의 메카였다. 또 히피문화의 음악적 상징이었던 비틀즈는 잠시 음악활동을 접고 북인도의 리리케쉬에서 명상과 요가를 배우며 자리를 잡아 전 세계의 이목을 북인도의 작은 지역인 리리케쉬에 모으기도 했다.

여행은 음악과 더불어 자유개인을 추구하던 히피문화를 전세계로 확산시켰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와 동원의 체제, 군대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며 참전거부, 반전집회, 혼숙과 공동체 생활 등 기존 사회를 뿌리 채 뒤흔들어 놓는 문화의 충격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여행의 길을 내는 이들은 언제든 소수였으며, 그 걸음은 느리고 더딘 것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이 깊은 걸음으로 천천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이,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세계는 철도를 놓듯, 도로를 깔듯 관광산업이라는 거대한 길을 무서운 속도로 만들어 왔다.

여행인문학 3 여행의 현실, 관광의 그늘

버스, 자동차 여행의 시작

1912년 버스여행의 시작, 자동차 여행의 시대가 열리자 만인의 여행은 폭발적인 세계의 산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단순히 단 한 척의 호화 크루즈의 침몰이 아니라, 여행에서 배의 시대가 끝나고 철도와 자동차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26, 24만명의 미국여행자들이 유럽을 여행했고. 1920년대에 비로서 여행객의 사회적 신분층이 바뀌었다. 1955년 프랑스 떼제배 시속 331킬로의 질주를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여행의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행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세계는 더 작아지고, 인생은 더 길어진 것처럼 보였다.“1969년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으로 최초의 음속비행에 성공한 콩코드가 여객기로 주행을 시작하며 비행기 여행의 시대가 열리며 세계는, 혹은 만인의 여행 시대는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왔다.

여행하는 세계, 여행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정말 만인의 여행 시대가 온 것이었을까?

세계관광기구(World Tourism Organization)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관광인구는 2007, 전 세계 약 67억의 인구 중 여행인구는 2007년 기준 93천만 명을 기록했다. 19502500만 명이던 관광객은 200068500만 명으로 늘었고, 200793천만명에 이르렀다. 세계 인구가 2배로 증가하는 50년 동안 관광인구는 무려 12배 증가한 것이다. WTO201010억명, 2020년 세계관광인구가 16억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지속적인 관광시장의 성장을 내다보고 있다.

엄밀히 살펴보면 여전히 67억 인구 중 약 14%만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레미 레프킨의 분석에 의하면 G7 국가의 여행객이 전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행자의 국적을 경제소득 기준으로 분류한다면 세계 경제의 상위 15%안에 드는 나라의 국민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토마스 쿡이 연 대량관광의 시대는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나머지 50억 인구에게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여행의 권리가 아니라 여행이 남긴 것들을 처리해야 할 떠날 수 없는 자의 의무가 있을 뿐이다.

선진국에서는 관광이라는 분야가 국민 총생산의 3-5%였으나, 개발도상국에서 관광이 차지하는 비율은 국내 총생산의 30%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높은 수입의존율에도 불구하고 관광지로 각광받는 3세계의 나라들은 전혀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불편한 진실을 조사하고 기록한 카를 알브레히트는 그 관광의 그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구의 83%가 관광업에 종사하는 몰디브 국민의 절반은 하루 1유로 미만으로 생활하는 처지이다. 관광은 가난한 국가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관광 수입이 자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해당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경제적 이해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관광인프라 구조가 지역 경제에 통합되고 각 지방의 생활경제를 아울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나. 식사 메뉴에서 사파리 버스에 이르기까지 관광객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는 모든 것이 수입되며, 심지어 식수 공급마저 관광산업을 위해 제약을 받기도 한다. 주민들이 마실 식수의 양은 통제하면서도 호텔 풀장에는 깨끗한 물을 항상 가득 채워놓는 것이다. 관광 산업에서 얻은 수익 대부분은 여행객의 본국으로 다시 흘러들어간다. 관광인프라 구축비용은 대부분 해당 관광지 국가가 부담함다. 환상적인 해변의 나라이면서도 국민이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는 몰디브는 이러한 불균형 사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카를 알브레히트 이멜, 현실문화)

여행이 지나간 자리는 일자리와 경제개발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님을 관광지가 되어 버린 수많은 나라들에서도 이내 깨닫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천국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이어진 리조트 개발은 원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어부들의 어장을 빼앗기도 했고, 지역 문화와 성스러운 공동체의 의례들은 관광지의 몇 푼짜리 쇼로 전락하는 쓰디쓴 경험들이 쌓여갔기 때문이다. 하루 20리터의 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지역에서 관광객들은 객실 평균 1.5톤의 물을 소모했고 30배의 전기를 사용했다. 농사에 필요한 물은 골프코스를 위해 쓰이고 가뭄과 기아에 시달리는 풍경들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자들의 눈 속에 그런 관광의 폐혜가 발견되고 목격되는 동안도 미디어는 여전히 여행지의 꿈같은 풍경을, 탐험과 모험이 가득한 여행의 설레임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인문학 4 새로운 여행의 역사 _ 여행자의 사회적 책임

70년대, 대량관광이 남긴 것들에 대한 발견

여행자가 아니라 여행자를 맞이하는 현지인의 입장에서 대량관광이 남기는 발자국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는 윤리적 여행자들이 그룹의 형태로 활동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다. 1970년대 교회나 인권 그룹 등은 3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넘어 현지에 뿌리내리는 주민운동, 빈민운동, 인권운동 등의 경험을 통해 핑크빛 관광개발의 약속 속에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내 몰린 3세계 사람들의 시선으로 관광을 냉철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관광이 1세계의 새로운 식민지 혹은 1세계의 놀이터를 넘어서지 못하는 일방적 패러다임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1세계가 3세계의 빈곤과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광과 이동을 통해 부를 재 분배하고 정의를 회복해 가는 여행자의 윤리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브라이든은 관광산업이 주장하는 지역 발전론을 향해 예리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관광이 고용과 외화획득의 주요 원천이 된다 해서 그 직접적 이익이 수용국 전체에 돌아가는지 아니면 단지 관광분야와 직접 관련된 일부 극소수에게 제한적으로 돌아가는지를 따져묻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관광이 가져오는 이익이 무엇을 잃은 댓가인지를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관광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관광을 위해 지불한 사회적 비용이 훨씬 더 큰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제관광, 1966)

1975,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는 관광에 의한 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그리고 생태적 영향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관광이 일으키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알리고 그 변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인권과 환경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새로운 여행자들은 쇼핑과 소비로 여행의 전부를 채우는 대신, 지역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의 여행을 창안하는 데에 주목하기도 했다. (사회적 책임여행자가 되는 법, 글로벌 익스체인지)

80년대, 본격적인 관광산업감시운동과 사회적 책임여행 운동의 시작

기독교운동이나 인권운동의 부분적 영역으로서의 관광에 대한 고민과 활동이 아니라 관광그 자체를 시민사회의 아젠다로 설정하고 관광산업에 대한 본격적인 감시와 견제, 대안적 여행개발에 본격적으로 주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

1988,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투어리즘 컨선은 무엇보다 1세계, ''의 여행자들이 3세계에서 편안한 휴가를 즐기도록 호텔과 리조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일어나는 강제이주와 노동착취의 문제, 아동성매매, 또 여행자들이 남기고 온 온갖 쓰레기와 문화적 충격, 지역사회의 파괴, 환경의 파괴들을 자신들의 사회에 들려주는 목격과 증언으로 여행을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다루는 담론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누구나 일 년에 몇 주의 휴가를 보내는 영국문화에서 들어본 적 없는 여행의 이면들에 관한 이야기는 시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달콤한 야자수아래에서의 휴가에 대한 이미지는 뒤집히기 시작했고, 여행자의 자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여행의 화두는 여행자의 윤리문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인 1989년 미국에서는 글로벌 익스체인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안(책임)여행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도 급속도로 퍼졌다. 이렇게 증가한 대안 여행은 여성 학교, 여성 커뮤니티, 자원봉사자 조직, 인권 대표 단체 등 여러 조직과 결합했다. 더욱 많은 여행객들이 지역을 찾았고, 이러한 여행의 방식은 운동의 연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감정적인 유대와 지식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체 사회 운동에서의 책임나누어 분담하는 분위기를 형성했고, 이렇게 여행에 초점을 가지고서 여행객들을 교육하고 그들과 각국의 연대를 조직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국에서는 글로벌 익스체인지가 시작되었다.”(www.globalexchange.org)고 그들의 출발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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